메모

23편
또 십몇일이 지났고, 화분 흙은 바싹 말랐다. 물을 흠뻑 줬다. 금요일 퇴근 후 저녁, 토요일. 이틀 동안은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고 그냥 집에서 숏츠만 봤다. 주말엔 이래도 되는 건가? 안되는 건가? 오늘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사 마시고, 작업실에 가서 저녁 먹기 전까지 외주 작업. 한 주 동안 마음 한구석을 콕콕 찌르던 투두 리스트 하나를 해치웠다. 한 번에 컨펌이 나면 좋겠다. 회사 일도 하려고 했는데 그건 못했다. 오늘 자기 전에 2-3시간은 봐야 하는데. 12시까지 일 좀 하고, 6시간 자고, 6시에 일어나서 다시 회사 가고. 그러면 8시 출근 시간 전까지 2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나는 내 시간을 이미 토큰화해서 쓰고 있다. 일이 끝없이 쏟아진다. 산성비 게임을 하는 것 같다. 삶이 게임이라면 이왕이면 열심히 사냥하고 성장하고 더 강해지는 RPG 게임이면 좋겠는데. 잠수 좀 타도 되는 그런. 하지만 아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판이고, 잠깐 한 눈 팔면 게임 오버다. 종종 '일이 많은 게 그래도 좋은 거지'라는 말을 들으면 속이 답답해진다. 물론 일을 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우울, 고립, 생존, 소외. 여기보다 한 단계 위에 노동과 피로와 소비와 불안. 여기보다 한 단계 위엔 뭐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스터디 카페는 일요일에도 하루 종일 만석이다.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꿈이라고 하던가-가 있던가. 아니면 아이가 있던가. 아니면 불만투성이로 맛있는 거나 사 먹으면서 늙어가던가. 삶에 반찬감을 의미는 생각보다 몇 개 없다. 삶이 왜 이렇게 서울의 묘하게 구린 프랜차이즈 식당들 같아지고 있는 것 같지. 비싸기만 비싸고 맛대가리가 없다. 진짜 자는 시간 빼고 일만 하는 선, 후배들이랑 겨우겨우 시간 맞춰서 밥 먹으면 서로 계산하려고 실랑이한다. 예전엔 왜 그러는지 이해 못 했는데 이젠 좀 알 것 같다. 돈이란 게 이럴 때나 쓰지, 나머진 뭐 벌고 모아봤자 대단한 이득도 없기 때문이다. 변호사로 일하는 후배는 의뢰인들을 만나러 서울 여기저기를 택시 타고 돌아다닌다. 의뢰인들은 대부분 무례하다고 한다. 의뢰인이 뒤에서 쫓아올까 봐 무서워서 택시를 타고나면 "빨리 출발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꽉 막힌 서울의 도로 위, 그는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말을 건다. 어떻게 지내세요. 다들 도대체 어떻게 계속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싶어서 말을 건단다. 다들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일하고, 놀라우리만치 취약하다. 지하철에 찌그러져있는 우리들을 볼 때는 애틋하고 회의실에서 표정이 썩어있는 동료를 볼 때면 짜증이 난다. 연민과 경멸 모두 사람을 대하는 마음으로는 비슷하게 오답이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산성비
아리스토텔레스 : 지금 하는 일이 나의 고유한 탁월함을 발휘하는 방향인가. 아니면 그저 시간을 때우고 있는가? 스토아 철학 :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고 있는가. 통제 밖의 일에 에너지를 쏟으며 괴로워하고 있진 않은가? 실존주의 :지금의 삶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진 결과인가, 아니면 주어진 대로 떠밀려온 것인가? 니체 : 지금 이 삶을 그대로 무한히 반복해도 좋은가? 공리주의 : 내 선택은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행복의 총량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유교 :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속 내 역할에 충실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도가 : 지금 나는 흐름을 거스르며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자연스럽고 편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는가? 실용주의 : 내가 믿고 따르는 신념과 가치들이 실제 삶에서 효과를 내고 있는가, 아니면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일 뿐인가? 불교 : 내가 지금 괴로운 건 어째서인가. 성공, 인정, 소유에 대한 집착 때문인가? 이것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나? 하이데거 : 나는 지금 '세상 사람들(das Man)'이 기대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유한성을 자각하며 살고 있는가?
잘 살고 있니
제철
제철
백로白露
백로白露
3/4분기. 직장인의 수확철 앞두고 팀 내에 공유한 몇 가지 생각들. 미팅록 이름은 오만하게도 '성공하는 법'. 일단 이기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내 욕망, 내 노력의 방향, 게임의 룰이 다 정렬되어 있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걸 열심히 하면 보상으로 돌아오는 판에 있어야 복리가 작동한다. 아니면 열심히 할수록 소진되고, 경쟁에서도 결국 진다. (시간이 갈수록 남아있는 경쟁자들은 복리를 누리는 이들일 것이기 때문에.) 루틴, 프로젝트, 목표 셋 다 있어야 한다. 루틴은 시간의 형태, 프로젝트는 시간의 주제, 목표는 종착점. 루틴이 없이 프로젝트만 있으면 마음은 바쁜데 생산성이 안 나온다. 프로젝트가 없이 루틴만 있으면 성과도 안 나오고, 목표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뭘 더 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가 없다. 목표가 없으면 루틴이든 프로젝트든 헛수고다. 루틴, 프로젝트, 목표 있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없으면 무조건 실패한다. 멍청한 생각을 안 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인 이상 멍청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이걸 피하기 위해서 자주 쓰는 도구들. 프리모템 : 부검이라는 뜻. 하고 있는 일이 완전히 망했다고 가정해 보자. 왜 망했을까? 답을 생각해 보고, 그걸 지금 바로 고친다. 간단해 보이는데 은근 잘 못한다. '개망함'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내기가 어렵기 때문. 용기를 쉽게 내려면 스스로에게 자주 얘기해 줘야 한다. 나는 우주먼지야. 동료에게도 자주 얘기해 줘야 한다. 망해도 우린 널 사랑해! 커네빈 : '놓인 자리'라는 뜻. 문제는 저마다 다른 칸에 놓여있다. 문제는 칸별로 그에 맞는 접근 방법이 있다. 흔한 '칸'은 단순한 문제, 복합적인 문제, 잘 모르겠는 문제, 큰일 난 문제, 무질서한 문제. 단순한 문제는 세상에 답이 이미 있어서 그걸 잘 따라 하면 되는 문제. 바퀴를 재발명하겠다고 고민하면 안 된다. 복합적인 문제. 여러 변수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문제. 이건 전문가한테 맡기거나, 아니면 AI한테 맡긴다. 잘 모르겠는 문제. 이건 해보기 전엔 모른다. 새 프로덕트가 잘 팔릴까? 누가 아나. 빨리 시도해 보고 검증해 봐야 안다. 큰일 난 문제. 단순하든 복잡하든 일단 눈앞에 직면한 문제부터 해결한다. 불이 났으면 불을 꺼야 한다. 무질서한 문제. 앞의 4개 중 어떤 칸인지 알아낼 때까지 더 들여다본다. 이건 기본이고. 커네빈을 조금 더 넓게 해석하면 문제를 해부하기 위해선 맞는 방식으로 데이터 라벨링을 해야 하고, 라벨링을 위한 체계도 여러 개가 있다는 인식도 갖고 있어야 한다. 이항대립으로 생각할 때와 매트릭스 뷰로 생각할 때 결과는 아주 다르게 나온다. MECE 피라미드 : Mutually Exclusive(서로 겹치지 않고)+Collectively Exhaustive(모으면 전부). 명제를 맨 꼭대기에 두고, 그 아래에 MECE 한 근거들로 기둥을 세운다. 서로 겹치지 않고 모으면 전부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부할 수 있으면 꽤 탄탄한 모델. 파레토 : 중요한 소수를 중요하게 대접한다. 변수들 간의 민주주의 방지. 중요한 것만 먼저 고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
성공하는 법?
미래
미래
마드레날린 도구
마드레날린 도구
늦여름의 점검
늦여름의 점검
일요일 : 월요일 할 일을 미리 하려고 마음먹지만 일요일에 쉬어야 한다는 도그마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다. 일하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닌 상태로 하루 종일 뒹굴다가 저녁 즈음 겨우겨우 노트북을 켠다. 온갖 일들에 주의를 뺏기다가 결국 늦게 자는 날. 월요일 : 막상 출근하면 생각보단 할만한 날. 애써 회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주말 잘 보내셨나요라고 묻고, 돌아오는 적막을 견디는 날. 할 일 잔뜩 만들어두고 일단 퇴근한다. 화요일 : 야근하는 날. 일 말고 다른 생각하기 힘들다. 수요일 : 야근하는 날. 일 말고 다른 생각하기 힘들다. 2 목요일 : 수요일까지 똑바로 돌아갔으면 한숨 돌리고 병원에 가거나 귀찮은 행정 처리를 하거나 인간관계 유지를 위한 약속 잡아도 되는 날. 금요일 : 일상의 무게가 극적으로 가벼워지는 날. 일단 내일은 좀 쉴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가뿐하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제법 괜찮은 덩어리의 시간이 앞에 놓여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낙관하게 된다. 토요일 : 최선을 다해서 사치와 방종을! 아, 벌써 어제가 아득하다.
일주일
쳇바퀴 안 타고 살 수는 없고, 지금 타고 있는 쳇바퀴가 맘에 안 든다고 여러 개의 쳇바퀴를 굴리려다간 몸이 상하고. 쳇바퀴 하나를 잘 골라야 하는데. 공원 뚫고 출근하는 길에 청설모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쳇바퀴. 열심히 타면 그 보상으로 더 쳇바퀴 타는 게 점점 더 쉬워져야 하는데. 굴리는 게 복리로 작동해야 하는데.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은 구조적으로 지는 게임 같다. 타수 아무리 빨라도 결국엔 게임 오버 당하는 산성비랑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일 쳐내고, 또 하나 쳐내고, 또 하나-. 일 마칠 때 나오는 도파민으로 목숨 연장하고. 그나마 이것도 안 하면 템 다 드롭하고 바로 태초마을에서 초보자로 다시 시작인 거다. 성황당 할머니한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세 번 외치고 싶어라.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밤은 선선하다. 애인 따라 지인 결혼식 따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대화. 올해 여름 진짜 더웠지. 응. 이게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여름 중 제일 시원한 여름이라니. 악담 좀 그만해. 악담 같은 현실을 파훼한 마땅한 전략도 없이 매일매일에 달려들고 있다. 달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같이 땀 흘리면서 뛰고 싶은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쳇바퀴
팀 리드를 3년쯤 하다보니 면접관 입장에서 면접을 치룰 일이 꽤 많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고정으로 쓰는 질문들이 생겼는데 오늘 다른 팀장님들, 대표님이랑 채용 관련해서 얘기 나누다 보니 쓰는 질문들이 다 비슷하더라. 포지션, 연차와 상관없이 면접에서 검증해야 하는 것들의 기본은 다 통하는 듯. 먼저 경험을 검증한다. 경험을 검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꼬리 질문. 이력서에 적은 경험을 그냥 듣는 건 '사실대로 적은 것 맞죠?' 재확인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당시의 목표는 무엇이었는지(가급적이면 숫자로), 어떤 의사결정들 사이에서 고민했었는지 같은 질문을 5번 정도 파고들어서 해야 한다.(5Why 프레임워크가 여기도 적용) 역량. 역량은 경험과 다르다. 이전에 쌓은 경험들은 보통 팀으로 한 일이기도 하고, 과거의 데이터여서 지금 이 사람이 우리 팀에 합류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검증하는 툴로는 부족하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선 우리 상황과 데이터를 주고, 시나리오를 짜보라고 해야 한다. 미션은 뭐고, 상황은 이렇고, 예산과 기한 등 제약을 알려주고 어떻게 미션을 해낼 것인지에 대한 답을 듣는다. 일반론적인 접근법-예를 들어 '리서치부터 하겠습니다.'-로만 답이 나오면 조금 더 파고든다. 더 깊은 답을 얻어내지 못한다면...기대치를 조절한다. 태도. 면접을 준비하는 과정 동안, 지원한 회사의 직무와 관련되어 있는 조사를 해 보았는가. 가령 마케터면 광고 라이브러리 한번 들어가 봤는가. hr 매니저면 채용 페이지 한번 뜯어봤는가. 이것도 안 하는 사람 진짜 많다.
면접 질문
12개의 세상
12개의 세상
인센티브
인센티브
인생 난이도 낮추는 방법
인생 난이도 낮추는 방법
친구들 만나서 밤새 그 어떤 진지함도 없는 얘기만 하다가 술 냄새 풍기며 쓰러져 자기. 투 두 리스트, 워크플로, 루틴, 하네스, 루프 따위의 개념을 따라 흐르는 정보로 이뤄진 매끈하지만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시스템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시끄럽고 무례하고 의미 없고 천박하게 놀기.해장국으로 끝나는 이 의례의 이름으론 역시 해장이 어울릴 것이다. 끊임없이 주의력을 좀먹는 디지털-주의력 노동의 취기를 가라앉히는 해장.결국 인간성은 노드로 쪼개질 것이다. 라벨이 붙은 데이터가 될 것이다. 무겁디무거운 의미가 모두의 승모근을 결리게 할 것이고 디지털 마약은 진실을 먼지로 풍화시켜 버릴 것이다.이 정해진 미래를 향해 가는 걸 멈출 순 없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엔 그래도 무의미의 셸터가 있다. 퇴행의 축제가 있다. 종종 먹고 마시고 해장하면서 가자.
해장
돈 얘기
돈 얘기
시간 세는 법
시간 세는 법
성과내는 팀을 만들기 위해선 루틴, 프로젝트, 목표 3개가 ‘전부’ 필요하다. 프로젝트 정해진 기간 안에 특정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회성 작업 단위. 성과의 '증거'가 되는 단위이자, 팀의 역량과 임팩트를 외부에 보여주는 수단. 프로젝트 없이는 루틴과 목표가 추상적인 채로 남는다. 루틴 반복적으로 실행되는 운영 체계. 프로젝트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기반이자, 팀의 기본기(quality baseline)를 유지하는 장치. 루틴이 없으면 매번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재설계해야 하고, 팀원 개개인의 컨디션에 성과가 좌우된다. 목표 프로젝트와 루틴이 향하는 방향성이자 우선순위 판단 기준. 목표가 없으면 프로젝트는 산발적이 되고, 루틴은 관성으로 전락한다.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답하는 장치이며, 팀원들의 동기부여와 자원 배분의 기준이 된다.목표가 방향을 정하면, 프로젝트가 그 방향으로 가는 구체적 이정표를 세우고, 루틴이 그 이정표까지 흔들림 없이 걸어가게 만드는 것. 목표 없는 프로젝트는 방향성을 상실하고, 프로젝트 없는 목표는 공허한 슬로건에 불과하다.루틴 없는 프로젝트는 집단 번아웃과 할 때마다 0에서 1을 새로 시작하는 비효율을 만든다.
성과내는 팀의 3요소 : 루틴,프로젝트,목표
이곳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글쓰기가 말하기와 아주 다른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더 이상 얼굴을 갖지 않기 위해, 자신의 글쓰기 아래 스스로를 묻어 버리기 위해 글을 씁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 곁에, 바깥에 있으며, 종잇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재미없고 지루하며 근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타인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이 삶이, 우리 눈앞에 있고 우리가 그 주인인 이 작은 직사각형의 종이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가도록 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상당한 위험 중, 미셸 푸코 무엇을 쓰느냐는 사실 어디에 쓰느냐에 달려있다. 같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하더라도 공책에 손으로 적을 때, 혼자 보는 옵시디언 메모장에 적을 때, 빈 워드 문서에 적을 때, 슬랙에 적을 때 다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어떤 도구랑 상호작용할지도 맥락이고, 맥락이 달라지면 내용도 변한다. 그럼 블로그는 언제 쓰는 도구인가. 정제되지 않은 잡소리를 모바일로 아무 사진이랑 같이 올리고 싶을 때, 일상이라는 공간에서 글을 쓰나 안 쓰나 어차피 흘러가는 시간을 굳이 굳이 비정형 데이터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릴 때. 일기라고 하기엔 너무 공개되어 있고, 에세이라고 하기엔 주제가 없는 잡문만을 위한 자리가 갖고 싶어져서 굳이 굳이 출근 전 카페에 들러 블로그를 정리했다. 과거를 비공개로 돌려 매끈해진 게시판에서 또 한 번 새로 시작. 잡초가 수북하게 쌓인 정원은 주인의 무심함을 증명하는데 잡문이 수북하게 쌓이면 무엇을 증명하게 될까. 자꾸자꾸 정리하고 자꾸자꾸 새로 시작하는 나를 못 미더워하는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퇴근길 지하철에서 블로그를 쓴다. 짧은 연휴는 지나갔고 다시 평일이다.
블로그적인 블로그
코드 두 줄
코드 두 줄
포르투갈의 높은 산 : 질문들
포르투갈의 높은 산 : 질문들
두 개의 세상이 있다. 이 두 세상은 겹쳐져 있다. 표면의 세상을 ‘규칙의 세상’이라고 하자. 막내딸은 평생 결혼을 할 수 없고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마마 엘레나의 농장이다. 두 번째 세상은 사랑의 세상이다. 이 두 번째 세상은 첫 번째 세상에 덮여있어서, 기름이 튀겨져 나오거나 불꽃이 이는 순간에만 잠깐씩 드러난다. 눈길로 물을 덥히고, 음식으로 사람을 발정하게 만드는 모든 마술적인 순간은 사랑의 세상이 잠시 드러난 순간이다. 사람들은 규칙의 세상을 지으며 오랜 시간 살아왔고, 그 결과 사랑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거의 잊어버렸다. 그러나 잊어버렸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실은 잊어버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티타의 이야기는 이 불가능성을 다루고 있다.1마마 엘레나는 농장의 수호자인 동시에 농장 그 자체이기도 하다. 농장은 규칙의 세상을 상징한다. '마마 엘레나-농장-규칙의 세상'은 티타의 운명을 결정해둔다. 티타가 절대로 원하지 않는 터무니없는 운명을. 한편으로는 마마 엘레나 역시 이 터무니없음의 피해자이기도 한데, 마마 엘레나는 피해를 감수하고도 규칙의 세상을 지키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농장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요리의 레시피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느라 정작 그 요리의 맛은 모른다. 그녀에게도 사랑의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지만, 마마 엘레나는 그 순간을 도려내서 상자에 보관했다. 마마 엘레나는 불행으로 값을 치렀다.
사랑의 유예 불가능성
점심시간을 틈타 책을 후다닥 읽었다. 몇년 전,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칼럼계 아이돌 칭호를 얻은 김영민 교수의 산문집,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이다. 칼럼계 아이돌은 이번엔 ‘정치’를 안내하는 박학다식한 가이드로 분한 것 같다. 정치 개론에서부터 출발한 넉살 좋은 가이드의 이야기는 제도와 역사와 개념들을 드문드문 꿰어가며 우리 사회의 일상적 풍경까지 도달하는데, 글 하나하나마다 명화, 고전, 영화 등 인문학적 양념이 워낙 잘 쳐져 있어 읽는 재미도 상당하다.그런데 이 책, 재밌다고 해서 마냥 가벼운 건 아니다. 외려 묵직한 카운터 펀치를 숨기고 있다. 탈정치화되기 쉬운 세태를 인정하면서도, 그 경향성을 은근하게 조소한다. 전문성이 유명세와 혼동되고, 논쟁과 합의가 마케팅으로 대체되고, 시민이 팬으로 환복 하는 풍경을 슬쩍슬쩍 보여주며 당신의 내면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은근히 눈짓한다. '오... 이거 흥미로운데?' 하며 가이드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도착하는 곳은 언제나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이다. ‘정치’인 줄 알았던 여행지는 이제 보니 ‘인간’이었다.
인간으로 사는 일은 개같은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