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비

No. 0291
2026.09.13 · 1,003자 · 약 2분
  1. 또 십몇일이 지났고, 화분 흙은 바싹 말랐다. 물을 흠뻑 줬다.
  2. 금요일 퇴근 후 저녁, 토요일. 이틀 동안은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고 그냥 집에서 숏츠만 봤다. 주말엔 이래도 되는 건가? 안되는 건가?
  3. 오늘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사 마시고, 작업실에 가서 저녁 먹기 전까지 외주 작업. 한 주 동안 마음 한구석을 콕콕 찌르던 투두 리스트 하나를 해치웠다. 한 번에 컨펌이 나면 좋겠다. 회사 일도 하려고 했는데 그건 못했다. 오늘 자기 전에 2-3시간은 봐야 하는데. 12시까지 일 좀 하고, 6시간 자고, 6시에 일어나서 다시 회사 가고. 그러면 8시 출근 시간 전까지 2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나는 내 시간을 이미 토큰화해서 쓰고 있다.
  4. 일이 끝없이 쏟아진다. 산성비 게임을 하는 것 같다. 삶이 게임이라면 이왕이면 열심히 사냥하고 성장하고 더 강해지는 RPG 게임이면 좋겠는데. 잠수 좀 타도 되는 그런. 하지만 아니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판이고, 잠깐 한 눈 팔면 게임 오버다. 종종 ’일이 많은 게 그래도 좋은 거지’라는 말을 들으면 속이 답답해진다. 물론 일을 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우울, 고립, 생존, 소외. 여기보다 한 단계 위에 노동과 피로와 소비와 불안. 여기보다 한 단계 위엔 뭐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스터디 카페는 일요일에도 하루 종일 만석이다.
  5.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꿈이라고 하던가-가 있던가. 아니면 아이가 있던가. 아니면 불만투성이로 맛있는 거나 사 먹으면서 늙어가던가. 삶에 반찬감을 의미는 생각보다 몇 개 없다. 삶이 왜 이렇게 서울의 묘하게 구린 프랜차이즈 식당들 같아지고 있는 것 같지. 비싸기만 비싸고 맛대가리가 없다.
  6. 진짜 자는 시간 빼고 일만 하는 선, 후배들이랑 겨우겨우 시간 맞춰서 밥 먹으면 서로 계산하려고 실랑이한다. 예전엔 왜 그러는지 이해 못 했는데 이젠 좀 알 것 같다. 돈이란 게 이럴 때나 쓰지, 나머진 뭐 벌고 모아봤자 대단한 이득도 없기 때문이다.
  7. 변호사로 일하는 후배는 의뢰인들을 만나러 서울 여기저기를 택시 타고 돌아다닌다. 의뢰인들은 대부분 무례하다고 한다. 의뢰인이 뒤에서 쫓아올까 봐 무서워서 택시를 타고나면 “빨리 출발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꽉 막힌 서울의 도로 위, 그는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말을 건다. 어떻게 지내세요. 다들 도대체 어떻게 계속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싶어서 말을 건단다.
  8. 다들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일하고, 놀라우리만치 취약하다. 지하철에 찌그러져있는 우리들을 볼 때는 애틋하고 회의실에서 표정이 썩어있는 동료를 볼 때면 짜증이 난다. 연민과 경멸 모두 사람을 대하는 마음으로는 비슷하게 오답이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사진을 찍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