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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73편 · 6 / 7
문명의 무게분갈이 몸살건강의 목적대체불가능한 김치볶음밥상경의 값최근의 여행은 제주도였다. 내겐 여행 갈 때 책을 딱 한 권만 들고 가는 버릇이 있다. 혹시나 시간과 비용을 쏟아서 가는 여행이 아무 의미 없이 끝나는 게 걱정돼서, 책이 담고 있는 의미가 여행의 의미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챙긴다. 의미의 보험이랄까. 책은 공들여 선정하지 않고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서 간다. 좀 미신적인 면모도 있지만 의미 부여란 결국엔 다 그런 거 아닌가.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얻은 책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신형철)』이다. 표지가 노란색 꽃이 가득 피어있는 들판 같길래 골랐다. 제주도 하면 유채꽃이니까. 저자는 책머리에 이런 문장을 써뒀다.<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이토록 근거가 탄탄한 자기소개라니. 책에 실린 모든 평론들이 모두 책머리에 실린 문장의 근거가 된다. 이 견고함은 나를 매료시켰다. 자신의 직업을 설명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풍부한 사람을 부르는 말은 아마 '프로'일 것이다. 풍부한 포트폴리오에 덧붙여 <나는 OOO이다. OOO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면 그는 '프로' 이상의 무언가이지 않을까.저 문장을 읽고 확실해졌다. ‘OOO'을 찾는 것이야말로 나의 오랜 욕망이었음을. 대학 졸업 후 나는 눌러앉을 직장을 찾는 대신 'OOO'을 찾아 헤매왔다. 비행기 차창 밖으로 구름을 봤다. 만약에 지금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찾아 그 모든 헤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것이다. 공기업에서 일할 땐 성과라는 말이 왠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느껴져서, 그게 참 못 견디게 싫었다. 마케터로 일할 땐 나쁜 점도 보이는데 좋은 점만 말하는 게 피곤해서 싫었고. 지금은? 청소, 배달, 택배 '플랫폼 노동 3신기'와 가뭄에 콩 나듯이 들어오는 일거리를 받아 풀칠이야 하고 있지만 다 싫은 건 매한가지다. 이 생활에 미래가 없는 줄은 알았지만 시간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느 때보다 시간이 모자란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영원히 젊을 순 없는데, 아무래도 나는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바보인가 봐. 여행이나 다니고 책이나 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지금 죽는구나. 여행 가는 길에. 책 읽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나는 OOO이다공든 탑의 심정으로수목원으로부터세이브포인트우리의 연휴 대화록언젠가 피라미드를 보러 갔었다. 동행 중엔 전직 가이드가 한 명 있었다. 그는 가이드답게 아는 것도 많고 말도 많았다. 피라미드로 가는 불편한 지프 뒷자리에서 그는 내게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지은 이유를 이야기해 줬다.이집트인들에게 사막은 무한한 공간이었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사막은 그들을 두렵게 했다. 이집트인들은 이 두려움을 관리하기 위해 꾀를 냈다. 원을 무서워하는 아이들이 원 안에 점을 찍어두면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고 낸 묘안이었다. 사막을 알 수 없다면 사막 안에 우리가 알고 있는 무언가를 남기자. 그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게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세웠다.피라미드를 떠올린 건 달력을 보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어느새 1년이 다 되었단 걸 깨달아서다. 보잘것없는 1년이었다. 부자가 되지도 못했고, 유명해지지도 못했고, 행복을 찾지도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럭저럭 살아내는데 급급했던 1년을 돌아보는데 피라미드처럼 대단한 건축물이 떠오르다니, 이 무슨 과대망상인가 싶었다.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른 피라미드의 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내 지난 1년이 피라미드의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궁리를 시작했다.일단 나는 피라미드를 인수분해해 보기로 했다. 전체끼리야 비교가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지만, 세부 요소는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먼저 피라미드를 짓는 보통사람들의 땀과 근육통과 나의 안구건조증과 만성피로. 둘은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노동의 애환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론 같을 것이다. 진흙을 게고 돌덩이를 나르는 동안 가슴속에 일었다 사라졌다 하는, 피라미드가 자신들을 구원할거란 믿음과 나의 일하다 보면 언젠간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란 희망 혹은 불안. 이 둘을 나란히 두는 건 합당한 처사다. 사막에서 강가의 집으로 돌아가며 아직은 보잘것없는 돌무덤 뒤로 떨어지는 해를 보며 느낀 감정과 내가 지하철 창문으로 붉게 물든 한강을 보며 느낀 감정. 이 둘을 구별하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부분의 유사성이 크니 내 1년도 피라미드 옆에 나란히 자리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피라미드, 맥주 네 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