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준의 기준
고민 이코노미
습관의 기원
환송, 슬쩍 돌아가기
크리에이티브
근미래의 예술아침에 핸드폰을 보다 이제는 잘 연락하지 않는, 사귄 지 오래된 친구의 생일이란 걸 알게 됐다. 케이크 모양 그래픽이 눈에 밟힌다. 하지만 출근이 급하므로 무시한다.에디터라는 직무가 풍기는 뉘앙스 덕분으로,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일종의 '글 프로'로 대우받는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내가 회사에서 쓰는 글들이 좀 부끄럽다. 애를 많이 쓰긴 했지만, 완성까지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좋은 문장과 나쁜 문장을 저울질할 시간도 퇴고를 위해 초고를 잠시 묵혀둘 시간도 없다. ‘내 글’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에디터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글을 잘 내다 버릴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수행하는 기능은 글이라기보단 마감이다.같이 점심을 먹은 동료는 내게 잘 읽었다는 말을 건넨다. 나는 그 잘 읽었다는 말 때문에 그가 정말로 읽은 것인지, 조금은 의심스럽다. "원래 글을 좋아하세요?" 그가 물어왔다. 그는 디자이너다. 나는 대답하기가 애매해서 그냥 질문을 돌려준다. "디자인... 좋아하세요?" 그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그의 일을 좋아하냐고 물어볼 때는 앞에 '그래도..'라는 쿠션어를 쓰는 게 좋겠다. 어느 유명한 영화의 명대사처럼. 그래도 디자인 좋아하시죠?회사의 개발자들과 얘기할 때마다 나는 글쓰기가 코딩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하곤 한다. 글쓰기도 모르고 개발도 잘 모르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개발자들이란 대게 눈이 퀭하고, 커피를 많이 마시며, 오랜 시간 자판을 타닥거리는 이들이라는 스테레오타입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그런 모습으로 자주 마주친다. 늦은 시간에. 화장실에서. 공통점은 또 있다. 우리가 하는 일 뒤엔 '짠다'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코드를 짠다. 논리를 짠다. 눈물을 짠다. 그래도 개발 좋아하시죠?조각배
대체불가능한 김치볶음밥
최후의 상품요즘 인터뷰 검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인터뷰이가 하루에 하나씩 한 달 동안 질문에 답하면 그걸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주는 프로젝트다. 자연스레 많은 사람의 글을 접하게 된다. 작업시간 때문에 일일이 읽어보진 못하고 문단 꼴 위주로 볼 수밖에 없지만 기어이 시선을 머물게 만드는 문장이 있다. 자꾸만 나타나며 작업 속도를 더디게 만드는, 두 유형의 아름다움에 대해 기록해둔다.첫 번째는 청년의 불안한 문장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순결함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닮아있다. 막 사회에 첫 발을 디딘 청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생에 대한 불안, 고뇌, 우울 같은 것들은 아직 세상의 어떤 모순에도 깊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불안한 문장은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나 으레 겪는 성장통쯤으로 누군가 이미 상품화해둔 문장의 복제품이 아니다. 어제까지의 삶을 길어 올려 내일의 삶을 창조하려는 시도에서 이는 불꽃같은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다’라고 말하며 불안을 손쉽게 무마하려는 나태함이 아니라,’ 원래 이런 것인가?’를 묻는 집요함이기에 아름답다. 불성실한 독자인 나는 내 시선을 붙들어 놓은 불안한 문장을 읽으며, 이 문장을 써놓은 청년의 삶이 속히 안정을 찾아 행복해지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과 잘 섞이지 않는 야망을 계속 간직해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품는다. 이런 마음이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나는 편히 그 덕을 누리려는 비겁에 불과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문장의 화자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치기 어린’이라는 형용사로 수식될 수 있는 고민으로도 누군가를 반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젊은 화자의 특권이다.두 번째는 노인의 겸손한 문장이다. 겸손이야말로 나이 든 화자가 부릴 수 있는 최상의 기교다. 오랜 시간 살면서 겪은 부침이 분명 있을 텐데, 그런 것들 쯤이야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간결한 문장에서 느껴지는 덤덤함. 나는 이것을 겸손이라고 부르고 싶다. 겸손해 보이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줄은 물론 알지만, 그저 덤덤함이라고만 부른다면 분명 존재했을 굴곡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내는 이 겸손의 기교는 얼마나 대단한가. 자신이 평생을 지켜온,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 하나의 행위에 집중한 짧은 자기소개나 오랜 시간 간직해왔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움이나 그 꿈에 들인 숱한 노력이라던가 정열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설명하는 문장 앞에선 언제나 가슴이 저릿해진다. 또 이런 문장은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노인의 겸손한 문장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떠벌리는데 급급했던 나의 지난날을, 또 좋아하는 것을 묵묵히 좋아하는 대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소리치는데 더 치중했던 지난날을 떠오르게 만든다. 이렇게 노인의 겸손한 문장은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설명되는 무한을 가늠케 한다. 기록과 발화의 강박에 묶여있던 이는 무한 앞에 세워짐으로써 반성하게 되고, 비로소 자유로워진다.청년의 불안한 문장, 노인의 겸손한 문장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분명 경쟁력이다. 세간에선 어떤 글을 '좋은 글'로 평할까. '글 잘 쓰는 법'을 조언하는 콘텐츠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말은 '짧게 써라' 인 것 같다. 가능한 한 쉽고, 정확하게, 짧게 써라. 그래야만 읽힐 것이니.하지만 꼭 짧게 써야만 '좋은 글'일까? 간결한 문장은 물론 글의 전달력을 높이지만, 그렇다고 간결함을 '좋은 글'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로 여기는 건 경계해야 한다. 세상엔 쉽게 표현될 수 없는 생각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비주류일수록 더 그렇다. 평론가 황현산은 '억압받는 사람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라고 썼다. 故 노회찬 의원은 비유적 표현을 선호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생긴 대로 살자는 말은 쉽지만 생긴 대로 살지 말자는 말은 논리구조가 복잡하다'라고 답했었다. 변화를 주장하는 모든 말을 사실 쉽게 쓰이기 어렵다. 진부한 생각을 간결하게 쓴 글과, 새로운 생각을 복잡하게 쓴 글 중 뭐가 더 '좋은 글'인지는 쉬이 판단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나는 이런 이유로 '짧은 글'이 '좋은 글'의 핵심적인 기준으로 대우하는 것을 경계한다. 짧고 간결하게 쓰이지 않았다고 해서 '나쁜 글'로 속단하고 글에게 읽힐 기회를 주지 않는, 게으른 독자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누군가 비주류의 이야기를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 이야기가 쉽게 쓰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 글에 대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어렵게 쓰이고 어렵게 읽힐지라도 '좋은 글'로 대접해야 하는 글이 있다.물론 전달력의 측면에서 '좋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겠지만, '좋은'이라는 말은 너무나 간단히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나눠버린다. 때때로 간결한 말은 생각의 흐름마저 간결하게 만들어버린다.짧게 써야만 좋은 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