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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61편 · 5 / 6
1내 인생의 첫 번째 탈주는 유치원에 처음 간 날이었다. 선생님은 내 앞에 사과가 그려진 종이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빨간색으로 칠해볼까?” 사과를 칠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나는 그 길로 조용히 크레파스를 내려놓고, 유치원 밖을 슬쩍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상어 인형과 함께하는 흥미진진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의미있다고 믿는 일(상어 인형)을 위해선 왜 하는 지 당최 모르겠는 일(사과 색칠하기)을 때려치워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최초의 사건이었다.다음 탈주는 다행히도 학교를 모두 마치고 난 다음이었다. 물론 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탈주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지만, 그땐 ‘땡땡이'라는 수습 가능한 일탈로 탈주 욕구를 적당히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나니 더 이상 땡땡이는 가능한 옵션이 아니었다. ‘존버'하거나, 탈주하거나 두 가지 옵션이 전부다. 이 냉혹한 이분법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갖춰야 할 자질이겠지만, 나는 늘 어른 되기보단 탈주닌자로 남는 편을 택했다.2나름 크고 안정적이었던 첫 번째 회사는 모든 게 너무 지루하고 좀 우습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 있어야 한다면 이왕이면 재밌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다. 절이 싫으면 별 수 있나, 중이 떠나야지. 탈주.재밌는 일을 찾아 들어간 두 번째 회사도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었다. 적당히 재밌고, 업무량도 적당하고. 그런데 이번엔 그 적당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 있는데 그 시간을 적당히 흘려보내는 게 젊음에 대한 죄악처럼 느껴졌다. 어딘가에 다른 삶이 있지 않을까?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며 돈과 재미도 놓치지 않는 삶이 있지 않을까?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한, 치기 어린 향수병을 대차게 앓다 또다시 탈주.탈주의 역사생산성과 생체리듬메타버스회의취준생과 직장인 그 사이 어딘가, 계약직이 있다. 일을 하면서도 계속 다음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이들. 대전의 한 공공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J씨를 만났다.계약직 청년의 페르소나로 선정됐다. 선정된 소감과 계약직으로서의 히스토리를 알려달라.계약직의 페르소나라니 당치도 않다. 그저 수십만 계약직 중 한 명일 뿐이다. 지금은 모 공공기관 홍보팀에서 1년짜리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고, 이전엔 세종 소재 국책 연구원에서 6개월짜리 계약직으로 일했었다. 그 전에 다른 공공기관에서도 출산휴가 대체 인력으로 일한 적 있다. 졸업하고 일하기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안됐는데 벌써 3번째 회사다.‘지방, 공공기관, 계약직’의 키워드로 커리어를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다 ‘지방, 공공기관,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사실 지방 사람에겐 공공기관만 한 직장이 없다. 안정적이고, 업무 강도가 낮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고, 무엇보다도 일단 집에서 다닐 수 있다. 고향에서 살려면 공공기관 아니면 공무원이다. 근데 난 공채를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졸업하고 집안 형편 상 어떻게든 빨리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뽑는 시기가 정해져 있는 공채보단 수시로 공고가 올라오는 계약직에 더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NCS를 준비하면서 독서실 다닐 필요 없이, 아삽(ASAP)으로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렇게 계약직의 세계에 입문했다..직장을 찾아서 ‘지방, 공공기관, 계약직’의 세계에 들어섰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원래 하고 싶었던 직업은 따로 없었나?사실 전공을 살려서 광고기획자가 되고 싶었다. 졸업 전에 서울에 있는 광고대행사에서 인턴을 잠깐 했었는데 그때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다들 겪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집값이며 생활비며 경제적인 문제에서부터 서울이라는 낯선 환경에 혼자 뚝 떨어진 것 같은 정서적인 부분까지 여러모로 지옥이었다. 아무래도 집이 지방이다 보니까 감수해야 할 것들이 조금 더 컸던 것 같은데 나는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랄까, 역량이랄까. 뭐가 됐든 그게 없는 사람이었다.계속 다음 일을 찾는 이들업무 분장여전한 위협들어메이징 용인술나는 비겁자로소이다퇴사할 땐 하고 싶은게 참 많았다. 매일 만화도 그리고, 내 브랜드도 런칭하고, 글도 꾸준히 써서 그걸로 먹고 사는 멋진 디지털 노마드가 되려 했었다. 1년 뒤, 하려 했던 것들을 조금씩은 다 건드려보긴 한 것 같긴 한데 결과는 영 신통찮다. 나는 과연 성장했나. 성장했다고 말하려면 이전엔 몰랐던 것,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나는 되려 이전만 못 한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든다. 멈춰있진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멀리 온 것 같지도 않고. 출정과 퇴각을 번갈아가며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얻은 게 아주 없진 않다. 이런 저런 툴들을 조금 더 잘 만지게 되었다. 몇십 개의 SNS 게시물이 남았다. 두세 개의 프로젝트가 남았다. <풀칠>도 남았다. 하지만 이것들을 뜯어먹고 살 수 있을까. 내가 이룬 것들은 어쩌면 부지런한 직장인이 연차를 붙인 주말 서너 번으로 이룰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은 언제나 나를 깊은 불안에 빠트린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것들이 남들에겐 그저 사이드 프로젝트나 부업이란 이름으로 열정을 증명하고 돈을 벌어내는 바람직한 취미활동에 불과하다는 생각. 내 생각에 이건 진지해질수록 무능해지는 게임이다. 가볍게 시도하라는 조언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걸 보면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다.그러나 나는 자꾸만 진지해지고만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생산성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쉽게 떠오르는 진부한 이야기는 미뤄두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길 만들어내고 싶기도 하다. 부끄러움 없이 나 자신을 창작자로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려구요”에서 “창작자가 되어 보려구요”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어쩌면 1년 동안의 유일한 성과인지도 모르겠다. 돈을 많이 벌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전혀 창피하지 않은데, 내 맘에 드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건 왜 이렇게 머쓱하고 부끄러운지 모르겠다.어느 무직 1년 차의 소회월루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