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는 데 순서 없다
지난 몇 년간 같이 일했던 동료의 마지막 출근 날. 롤링페이퍼에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가, ‘같이 성장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라고 적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아, 성장이라. 이건 너무 상투적인데.
그는 내 직속 상사였다. 나보다 한 단계 위 조직장. 우리 나이 때 무슨 무슨 조직장이니 리더니 하는 게 밖에서 보면 좀 웃길 수도 있다는 건 알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나. 운 때가 맞았고, 세상이라고 해야 할지 자본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돈 많은 아저씨들이 우리를 거기다가 갖다 놨다. 그렇게 우린 회사의 연간 목표 달성을 위해서, 또 같이 일하게 된 사회 초년생들이 커리어를 위해서 회의실과 스프레드시트 속에 갇힌 처지가 됐다.
팀장 일은 사람을 질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열댓 명의 이런저런 불평을 나도 모르게 회사의 논리대로 받아치는 면담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나는 이 일을 억지로 계속해야 할 어떤 ‘절대적 이유’는 딱히 없단 걸 문득 깨달았다. 그냥 관두고 생활비는 몇 년 전처럼 배달이나 좀 뛰자. 굶어 죽진 않겠지. 일단 결심을 하니까 웃음이 실실 났다. 그렇게 실실 웃으면서도 그냥 웃음이 나서 웃은 건 올해엔 이게 처음이네란 생각을 했다. 관두자. 하루라도 빨리.
바로 그다음 날, 그에게 나 이제 그만 관두고 싶다고, 여기서 튀어야겠다고 운을 뗐다. 그는 밖에 나가서 커피나 한잔하자고 받았고. 회사 사람들 마주치면 좀 그러니까 거리가 좀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소나기가 내렸는데 그냥 맞으면서 갔다. 흠뻑 젖은 채로 무슨 얘길 했었더라.
뭐가 문제냐. 사람들이 문제면 원하는 대로 팀을 다시 짜보자. 아니면 일단 휴가를 좀 다녀와라. 다니는 동안 챙길 거 최대한 잘 챙겨서 더 좋은 기회 있을 때 가면 안 말린다. 좀 더 참아보자.
미지근한 커피를 홀짝이면서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내가 당장 관두면 얘도 참 난처하겠단 생각이 들었고 왠지 그건 좀 싫었다. 커리어나 일 욕심은 하나도 없지만 눈앞에 있는 이 사람, 나랑 비슷하게 일하고 비슷하게 고통받는, 비에 젖어있는 이 사람이 난처해지는 건 싫었다. 미지근한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말했다. “생각해 볼게요.”
이게 벌써 일 년 전 얘기다. 그동안 성과평가 시기도 무사히 한 번 넘겼고, 자잘한 조직개편이 있었으며, 몇 개의 건질만한 프로젝트와 몇 개의 말아먹은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돌아온 소나기의 계절.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빈 회의실로 불러서 말한다. “저…사실 이번 달까지만 하고 관둬요.”
아, 그 머쓱한 표정이라니.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딱 작년에 관두겠다고 결심했을 때 느낀 것 만치의 상쾌한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시 실실 웃음이 난다.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농을 건다. “아, 내가 먼저 튀었어야 했는데.”
오랜 시간 조직에 헌신하며 성장에 기여한 사람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회식. 다들 서운하다, 어딜 가냐, 아쉽다하면서도 웃으면서 술 먹고 노는 저녁. 고기를 굽고 소맥을 말며 떠드는 사람들. 점점 목소리가 커져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될 정도다. 저 멀리 자리에서 그가 일어나 뭐라 뭐라 인사를 한다. 통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잔을 들고 그에게 간다. 옆자리 디자이너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기획팀을 건너, 개발팀을 지나, 세일즈팀과 악수도 한번 하고 그에게 가서 손에 회사 앞 카페에서 산 원두 한 팩을 들려준다. 또다시 머쓱한 표정. 나도 머쓱한 미소로 눈인사를 하고 고깃집 밖으로 나간다.
불이 죄 켜져 있는 고층 빌딩들 사이, 여전히 성장에 목마른 어른들의 대열이 지하철역까지 빼곡한 저녁시간. 사원증을 목에서 풀어 손끝에 건 다음 휙휙 돌려본다. 어린애들이 하는 장난처럼. 이대로 돌리다가 손가락을 잘못 까딱하면, 사원증은 어디까지 날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