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은 잃었지만> — 풀칠러와의 대담

No. 0201
2025.11.06 · 8,406자 · 약 17분 · 도판 4점

1.초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풀칠러 : 반갑습니다. 풀칠 팀. 최근 초심을 잃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준비한 겁니다. 오늘같이 탐구해 볼 주제가 바로 ‘초심’이거든요. 야백님이 나와계시네요. 혼자신가요. 다들 오고 있다고요. 네, 좋습니다. 먼저 시작해 볼까요? 그래, 초심을 잃어버리신 게 맞습니까?

야백 : 예. 반갑습니다. 초심을 잃어버린 장수 에세이 레터 풀칠의 야백입니다. 하지만 누가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아닌가요. 초심이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보다 보면, 초심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가능하긴 한 것인지를 의심해 보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초심’이라는 말이 발화되는 순간에, 초심이란 녀석은 언제나 부재중이지 않나요? ‘초심 찾자, 초심을 기억해, 초심을 잃었네’ 같은 용례들은 늘 초심의 부재를 증명하는 정황증거들이다 이 말입니다. 초심은 어쩌면 이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고, 현실에선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땅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까요.

풀칠러 : 어…그래서 초심을 잃길 잘했다는 건가요?

야백 : 아뇨.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말꼬리를 잡으려는 건 아닙니다-용서하세요.)그저 저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게 애당초 불가능하단 의견을 얘기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유지되기보단 변화하는 것이 기본값인 우주에 태어났다는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거죠. 풀칠러님도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 지금의 마음엔 차이가 있지 않나요?

풀칠러 : 흠. 맞아요. 많은 변화가 있긴 했죠.

야백 : 그거 보라니까요. 이번 주엔 이런 아름다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시간에 따라 취향이 바뀌듯, 일에 대한 고민과 방향도 바뀌는 게 자연스러울 텐데요. 풀칠팀은 그런 고민을 겪으신 적이 있는지, 있었다면 어찌 대처하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 질문을 두고 아름답다고 표현한 이유는,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이 우주에서, 순간을 직면하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순응하는 마음과 주체적인 마음 사이의 중용이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우리 초심보다는 변화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뒤늦게 아매오와 파주가 도착한다.)

아매오 : 아이쿠. 늦었습니다. 초심을 잃어서 죄송합니다. 다들 풀칠 더 열심히 써야지 써야지 생각하면서도 본업이 바쁘니 그게 쉽지가 않네요. 저희도 초심이 사라졌다는 걸 생각하면 참 슬퍼요.

파주 : 무슨 이야길 하고 계셨죠? 시간에 따라 취향이 바뀌듯…일에 대한 고민과 방향도…

2.변하는 와중에 협업까지 하려니…

풀칠러 : 이건 정말 개판이네요. 좋아요. 변화에 대해서 얘기해 보죠. 변화와 관련된 질문들도 꽤 많이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여기서부터 시작해 볼까요. 야백님. 변화를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변화를 달갑게 여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질문이 들어온 걸 보면요.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하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는 크지 않은가요?”

파주 : 맞아요. 어마 무시하게 큽니다. 어떨 때는 내 인생이 이대로 뒤틀어진 채 끝나고 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게 되죠.

야백 : 맞아요. 스트레스! 특히 오늘처럼 회사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풀칠 마감도 해야 하는 날엔 모든 걸 내려놓고 세상에서 증발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아, 그런데 질문이 뭐라고 하셨죠?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하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라…이런 종류의 스트레스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조금 있습니다.

저는 스타트업 위주로 회사를 몇 군데 거쳐왔는데요(아이고! 내 팔자야!), 스타트업에선 이 변화란 놈이 다른 곳에서보다 훨씬 더 활발하고, 예의가 없습니다. ‘뭐 어쩌라고? 여기 스타트업인데?’ 이런 식이죠. 그렇게 직무도 바뀌고, 사업도 바뀌고, 어쩔 때는 대표가 바뀌는 경우도 있더군요. 그 대표님은 그리스어로 ‘나는 자유다 이놈들아!’ 라고 적힌 맨투맨을 모두에게 돌리고 퇴사했습니다. 여하튼, 이런 변화를 한번 통과할 때마다 나이테가 하나씩 생기는 느낌이 들어요. 네, 늙고 뚱뚱해진다는 얘기입니다. 업계에서는 ’회복탄력성’이 어쩌고 하면서 변화에 의연한 태도를 미덕이자 역량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다들 스트레스 엄청 받아합니다.

그런데 풀칠을 하면서 벌이는 새로운 시도들은 ’변화’라는 점에선 비슷하지만 이상하게 회사에서만큼 큰 스트레스로 느껴지진 않더라고요. 이런 걸 보면 내가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스트레스의 정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인 것 같네요. 변화를 당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변화를 주도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거죠. 제가 옛날에 모셨던 팀장님이 자주 하던 말인데, ’운전자는 멀미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운전자에겐 동승객들이 멀미를 느끼지 않도록 운전을 잘할 책임도 있잖아요? 아무쪼록 변화를 주도하라 수 있는 책임을 가진 이들이, ’주변인에게 가급적 덜 스트레스를 주는 방식의 변화’는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었으면 좋겠네요.

풀칠러 : 변화는 기본이지만,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는 엄청 받으시는 거군요. 그러면서도 변화를 주도하는 건 선호하고.

아매오, 파주, 야백 : 음. 맞습니다.

풀칠러 :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같이 프로젝트를 오래 이어서 한다는 게 어찌 보면 꽤 신기한 일이군요. 이참에 협업과 관련된 질문도 한번 훑고 갈까요. ’풀칠 팀원 여러분들의 협업은 괜찮으신가요? 콘텐츠에 대한 다른 이견 내지는 갈등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아매오 : 여태까지의 풀칠이 발행되었던 과정을 돌아보면 저희끼리 역할이 나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역할보다는 당번이 있었죠. 당번인 사람이 그 호의 내용을 책임지고, 나머지 사람은 코멘트를 쓰죠. 이런 방식이 굴러가는 이유는 모두가 풀칠을 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야백 : 그런데 최근엔 좀 다른데요, 저희끼리 풀칠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뤄보자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즉, 풀칠을 ‘일’로 대해보자고 얘기하고 있는데-그러니까 결국엔 우리끼리도 역할을 나눠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가 나오게 되더라고요. 이런 걸 보면 어떤 일을 잘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면 필연적으로 역할이 생기고, 역할이 생기면 그 역할의 권한과 범위와 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서로 어긋난 기대와 갈등, 규칙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 같아요. 회사가 갈등투성이인 것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욕망을 갖고 모인 곳이어서 그런 것 같네요.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견 내지 갈등이 있을 때엔 어떻게 해결하냐면…지금까지는 이견이 있으면 코멘트에 그 이견을 다는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편리하죠. 하지만 앞으로는 난투극을 벌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초심은 잃었지만> — 풀칠러와의 대담 — 에세이 (1/4)

3.동료와 나, 우리는 ’같은 편’일까

풀칠러 : 흠. 저는 풀칠 필진들의 우정이 오래오래 유지되길 바랍니다. 그나저나 풀칠이 왜 초심을 잃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답변이었어요. 어쩌면 풀칠을 ’일’로 대하려는 마음이 싹터서 초심을 잃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풀칠이 ’일’이 되면, 여러분들의 관계는 친구에서 동료로 바뀌겠군요. 그런 맥락에서 이번 질문은 동료에 대한 밸런스 게임입니다.

‘회사에 새로운 동료가 입사했습니다. 일은 끝내주게 잘하는데 이기적이고 예의가 없는 동료 vs 업무 역량이 부족하지만 인사 잘 하고 적극적인 동료. 이렇게 두 사람이 있다면 어떤 동료가 더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파주: 업무 역량이 부족하면서 이기적이기까지 한 제 입장에서는 둘 다 꽤나 훌륭한 동료라고 생각하는데요. 모든 팀 스포츠에 공격수와 수비수가 필요한 것처럼 적재적소에 두 사람과 어울려 협업하면 직장 생활도 꽤나 잘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역시, 양자택일을 하라는 말씀이시겠죠? 인성도 곧 실력이라고 믿는 저는, 이기적이고 예의가 없다면 협업하는 관계에서 ‘일을 잘한다’라고 평하기 어렵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봅니다. 반대로, 인사만 잘하고 적극적인데 일을 다시 하게 만드는 동료라… 그것도 나름대로 골치 아프네요. 둘 다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캐릭터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게 됩니다. 다른 동료를 이렇다 저렇다 평하기 전에 나는 어떤 동료였지…? 다른 동료들은 나를 잘 참고 기다려 주신 것 같아서 새삼 감사해지네요.

풀칠러 : 야백님은 회사에서 꽤 ’윗대가리’에 속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어떤 팀원을 뽑고 싶으신가요.

야백: 예. 작은 회사에 일찍 합류했더니 그렇게 됐습니다. 제 생각엔-물론 제가 뭘 알겠느냐만…-정말로 뭔가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일을 직접 하는 사람들 간의 이해관계가 정렬되어야만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이기적’이란 수식어가 붙을 정도면 왠지 이해관계의 정렬을 기를 쓰고 거부하는 사람일 것 같아서 후자를 고르겠습니다.

아매오: 어, 잠깐만요. ’이해관계의 정렬’이라. 듣기엔 꽤 그럴싸한 말이네요. 그런데 그게 직장 생활에서 정말 가능할까요? 누군가는 회사에 인생을 걸고 있고, 누군가는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한 수단 삼아, ‘월루’를 노리며 회사를 다닐 수도 있잖아요. 또 개인의 마음 안에서도 계절 따라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도 있고요. 어쩌면 ‘이해관계의 정렬’은 관리자 직급이 직원의 마음 깊은 곳까지 규율하려는 의도를 지닌 ’정치적인 언어’인 게 아닐까요?

야백 : 흠, 일리 있는 지적이에요. 사실 ‘이해관계의 정렬’이라는 이상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에서 그게 성립되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죠. 첫째, 역할과 보상, 규칙에 대한 명확한 합의. 둘째, 그 합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날 자유. 이 두 가지가 보장된다면 그건 상식적인 구조일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회사를 고를 때, 내가 어떤 합의를 한 건지, 그 안에 어떤 ‘패키지’가 들어 있는지 겪어보기 전엔 결코 알 수 없죠. 막상 예상치 못한 문제를 느끼면 이미 회사에 다니고 있으므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압박을 받습니다. 떠나는 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생계가 달려 있으니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거예요.

이런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회사에서 만나는 동료들은 1) 회사에서 만족하는 부류와 2)회사를 떠나고 싶지만 경제적 이유 때문에 못 관두고 있는 사람이 언제나 섞여있을 수밖에 없죠. 아, 생각할수록 이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군요. 회사는 더 투명해져야 하고,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더 솔직해져야 하죠. 하지만 이 둘 사이엔 돈이 끼어 있어요…어렵네요…어려워…

4.’나’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퇴사를 하게 되더라

풀칠러 : 아이쿠. 머리야. 저는 그냥 밸런스 게임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요. 하지만 일하면서 따라오는 일상들 중, 내가 사전에 합의한 부분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네요. 이건 풀칠팀이 자주 얘기하는 ’일과 삶이 맞닿는 애매한 경계’에 대한 얘기이기도 할 것 같아요. 이번엔 이 질문에 대해서 얘기해 보죠.

“풀칠팀이 이야기하는 ‘밥벌이의 미학’이라는 말이 참 좋아요. 일과 삶이 맞닿는 그 애매한 경계에서 ‘뭐가 진짜 나인가?’를 종종 묻게 되는데 혹시 세 분은 “이건 정말 내가 나답게 일하고 있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을까요? 그 순간이 궁금합니다.”

**야백 :**저는 제가 내린 선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 선택에 따르는 대가를 기꺼이 감수할 때 ‘나답게 일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거죠. 이건 내가 직장 내에서 정당하게 보장받고 있는 권한을 근거로 내린 선택이다. 이 선택은 많은 사람들이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괜찮다. 내가 틀린 것으로 판명 나면 난 실패자가 되고, 모두의 비웃음을 사고, 인사고과에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것까지 감수하겠다. 이런 방식으로 ’나’를 걸고 내린 결정들은 실행할 때, 나답게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사고방식은 비단 회사 안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조금 더 큰 의미에서의 일,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회사를 당장 때려치고 싶습니다. 제가 진짜 살고 싶은 삶의 모습과 다르거든요. 저는 고향에 내려가서 가족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겐 저를 먹여 살릴 돈을 벌기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서울에서 직장을 구해 돈을 벌고 있고요. 이 선택의 의미는 ’나는 일단은 돈을 벌어서 생존하는 것에 최우선 순위를 두겠다’입니다.

이 선택을 인정하고, 힘닿는 데까지 긍정하려고 아둥바둥대다보면 그 사이사이에 동료들과의 우정,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 다음의 뿌듯함 같은 좋은 일들도 생기는 거죠. 이런 종류의 ’아둥바둥’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풀칠>에서 포착하려고 하는 것이죠.

풀칠러 : 퇴사를 꿈꾸시는군요. 마침 퇴사랑 관련이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나이 30살에 직업을 바꾼다고 하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 될까요?”

아매오: 이건 제가 답변을 드리면 어떨까 싶습니다. 30살이 훌쩍 넘어 직업을 바꾸려고 하고 있거든요. 저는 약 6년간 콘텐츠 에디터, 커뮤니티 매니저라는 두 가지 업무를 했습니다(이것만으로도 이미 한 가지를 진득하게 못했다는 사실이 증명되네요). 그리고 지금 저는 작은 식당을 개업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저는 그러한 변화들을 마주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지 혹은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이랬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걸 계속하고 싶은가? 아니라면 왜? 그럼 무엇을 하고 싶은가? 대체 왜?’ 앞의 ‘왜’와 뒤의 ‘왜’가 서로 연결되기만 한다면 ‘못 먹어도 GO’를 외쳤죠.

애초에 뭔가를 바꾸는 행위에 깔린 의도가 ‘현재 내가 가진 것으로는 충족시키지 못할 무언가를 저것으로는 충족시킬 수 있을 듯하다’잖아요. 이건 기본적으로 예측의 영역입니다. 아무리 근거를 모아도 결국은 불확실하죠. 바꾸고 나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예측에 기반한 선택을 두고 ‘현명한가, 현명하지 못한가’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건 좀 가혹합니다.

질문자님이 주신 질문에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고민해야 할 부분은 ‘나이 30살에 직업을 바꾼다는 선택’이 아닌 듯합니다. 지금은 ‘현명함’이라고 쓰신, 그 선택을 평가하는 기준 아닐까요. 질문자님의 생활, 생각, 환경, 취향, 성향, 장기적 목표 등에 밀착된 기준. 좀 길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단어로 된 기준 말입니다.

제 기준은 무엇이었냐고요? 처음 2년은 재미와 의미, 다음 2년은 성장과 연봉, 이어진 2년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돈이에요(연봉과는 다른 의미로 썼습니다).

<초심은 잃었지만> — 풀칠러와의 대담 — 에세이 (2/4)

5. 우리는 언제까지 풀칠할 수 있을까

풀칠러 : 음. 한번 정리를 해볼까요. 그러니까 이런 얘기죠?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기준을 마련해두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선택들을 쌓아가면 현명한 것이다. 그 현명한 선택으로 돈까지 벌 수 있으면 가장 좋다. 그런데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생기니 괜찮다.’

아매오, 야망백수 : 예, 뭐, 얼추 맞습니다.

풀칠러 : 그런데 이 얘기엔 어쨌든 먹고사는데 필요한 돈을 계속 벌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마저 어려워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풀칠러님은 이런 질문을 보내주셨습니다. “풀칠도 어려워지는 미래가 온다면?”

아매오 : 극복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도 있죠. 그 결과 한층 성장할 수도 있지만 간신히 현상 유지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죠. 그러면 사라지는 것이고요. 어려워졌던 많은 것들은 결국 사라졌고 그 위에 또 새로운 것들이 탄생하면서 지금껏 이어온 게 이 지구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풀칠도 언젠가 사라지겠죠.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건 풀칠이 완결성을 가진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오랫동안 고이 간직할 수 있는.

야백 : 사실 그런 미래는 이미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결국엔 회사에서 잘리게 될 것이고, 너무 바빠지거나 멍청해져서(둘은 어떤 면에서 동의어 같습니다만) <풀칠>에 아무것도 쓰지 못하게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란 걸 알고 있어요. 제가 두 종말이 오는 순서를 고를 수 있다면 회사에서 먼저 잘리는 게 차라리 더 나을 것 같네요. 지나치게 나이브한 얘기인 줄은 압니다만 , 세상에 무언가 하고 싶은 얘기가 남아있고, 그걸 쓸 용기가 있다면 먹고사는 방법을 어찌어찌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파주 : 막상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미래가 도래한다고 상상하니,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네요. 대출과 생활비, 커피값은 어쩌지 머리를 박박 긁느라 귀한 10분을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역시 저는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며 오늘을 낭비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거지 같은 미래를 생각하니 출근하는 발걸음에 힘이 실리네요.

6. 먹고사는 것 외의 무언가

풀칠러 : 결국 돌고 돌아 ‘현재에 충실하자’ 군요. 좋은 얘기입니다. 낡은 감이 없진 않지만 현재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잖아요. 이제 이 대담도 슬슬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군요. 이제 마지막으로 ’의미’에 대해서 얘기를 해봅시다. 저는 <풀칠>은 먹고살기 바쁜 현재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끌어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느낌을 자주 받았는데, 다른 풀칠러들도 비슷한가 봅니다. 일상의 의미를 묻는 질문들이 꽤 많이 들어왔어요.

“’먹고사는 게 다’이지 않은 삶을 살고 싶은데, 하루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게 미션인 일상을 보내다 보면 결국 먹고사는 게 다이더라고요. 풀칠 에디터님들은 먹고사는 것 외에 어떤 것들을 삶에 품고 사시나요?”

야백 :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면 시절별로 먹고사는 게 다가 아니었던 이유들이 하나씩은 있더라고요. 시절의 컨셉이라고나 할까요. 어떤 울타리 없이 내가 나를 먹여살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사회 초년생 시절엔 ‘자립’, 회사 동료들이 너무너무 좋을 때는 ‘우정’이, 현실에 마음 둘 곳이 없을 때엔 ’추억’이…

풀칠러 : 너무 뻔하고 추상적인 답 아닌가요?

야백 : 음. 시시콜콜한 답도 같이 내놓습니다. 저는 요즘 저희 동네 빌라 주민들이 가꾸는 화분에 출근할 때마다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화분을 볼 때마다 그래, 우리는 무언가에게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게 아등바등 살아가는 일상에 대한 위로가 되는듯하여서요. 아주 시시하지만 구체적인 무언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한동엔 손에 쥐고 있다가, 질리면 버리고 또 다른 것을 찾고…이것도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풀칠러 : 글쓰기는 어떤가요? 자주 간을 잘 못 맞추긴 하지만 어쨌든 몇 년 동안 무언가 써내고 있잖아요. 마침 글의 의미를 묻는 질문도 들어왔습니다.

“풀칠 구독자이자 스티비 뉴스레터의 구독자입니다. 스티비 뉴스레터의 제목에서 풀칠이란 단어를 보고 반가우면서도 마치 나만 알던 인디밴드가 유명해져서 슬픈 홍대병 환자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풀칠 뉴스레터의 매력은 무심한 듯 꽉 차 있는 느낌이랄까요? 조용한데 입만 열면 웃긴 대리님 같아요. 서론이 길었는데 풀칠 뉴스레터의 편집자님들에게 글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글로 밥을 벌어먹는 처지에서 가끔은 글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있거든요. 노하우랄까 마음가짐이랄까 뭐 그런 거요…”

아매오: 현시점을 기준으로 말씀드린다면 제게 글은 좋은 취미입니다. 글을 쓸 때 혹은 읽을 때 매우 즐겁거든요. 괴발개발 늘어놓은 일기부터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지(혹은 카톡 메시지), 각 잡고 쓰는 다양한 종류의 글까지. 그래서 저 또한 글이 주요 밥벌이 수단이긴 했습니다. 직접 쓰는 것은 물론 남의 글을 매만지기도 했고 독서모임을 팔았으며 글쓰기 플랫폼도 운영했으니까요. 다만 언젠가 불현듯 깨달아버리고 맙니다. 제겐 글과 관련된 무언가로 평균 이상의 시장가치를 인정받을 만큼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딱히 슬프진 않았고요. 오히려 후련했습니다. 음. 그래. 밥벌이는 다른 걸로 하자. 그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요즘엔 초보 자영업자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틈틈이 쓰고 읽으려고 한답니다. 정말 재밌어서요. 거참. 글로 밥 벌어먹는 분이 주신 질문에 적절한 답변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야백 : 이런 질문을 받으니 뭔가 작가가 된 것 같고 좋은데요. 글이라. 저도 이게 적절한 답변일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는 흐르는 강물 같은 거라면, 평소엔 강의 표면에서 살다가 글을 쓰는 동안엔 그 강물에 조금 더 깊이 몸을 담그는 느낌이 듭니다. 그 느낌이 좋아서 계속 쓰는 민폐를 저지르고 있는 것 같네요.

<초심은 잃었지만> — 풀칠러와의 대담 — 에세이 (3/4)

7.우리의 마지막 문장

풀칠러 : 묻는 말에 적절한 대답을 하셔야죠. 저는 개인적으로 ’밥 먹을 시간이다.’하고 끝난다는 싱가포르 요리사 독자분의 에세이를 받은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는데요. 꾸역꾸역 글쓰기를 놓지 않고 있는 <풀칠> 세 분의 마지막 문장을 쓴다면?

야백, 파주, 아매오 : 요리사 풀칠러님의 ‘밥 먹을 시간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에 비견되려면 정체성을 녹여낸 한 문장이 이어야 할 텐데. 이거 어렵네요.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를 잘 모르겠어서요. 매일의 선택에 따라서 끊임없이 달라지는 게 나고, 오늘의 기분은 그 변화를 직면하는 태도를 제 정체성이라고 선언하고 싶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문장을 쓴다면…

야백 :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고 있다. 이것 참 웃기는 일이다.

아매오 :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은 지난 6년간 충분히 했다. 이젠 그걸 취미로 하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파주 : “이번에도 망한 것 같지만 내 인생이 전부 망한 건 아니다. 일단은 그렇게 믿어보기로 하자.”

<초심은 잃었지만> — 풀칠러와의 대담 — 에세이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