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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일리아스와 새
포르투갈의 높은 산 : 질문들두 개의 세상이 있다. 이 두 세상은 겹쳐져 있다. 표면의 세상을 ‘규칙의 세상’이라고 하자. 막내딸은 평생 결혼을 할 수 없고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마마 엘레나의 농장이다. 두 번째 세상은 사랑의 세상이다. 이 두 번째 세상은 첫 번째 세상에 덮여있어서, 기름이 튀겨져 나오거나 불꽃이 이는 순간에만 잠깐씩 드러난다. 눈길로 물을 덥히고, 음식으로 사람을 발정하게 만드는 모든 마술적인 순간은 사랑의 세상이 잠시 드러난 순간이다. 사람들은 규칙의 세상을 지으며 오랜 시간 살아왔고, 그 결과 사랑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거의 잊어버렸다. 그러나 잊어버렸다고 해서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실은 잊어버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티타의 이야기는 이 불가능성을 다루고 있다.1마마 엘레나는 농장의 수호자인 동시에 농장 그 자체이기도 하다. 농장은 규칙의 세상을 상징한다. '마마 엘레나-농장-규칙의 세상'은 티타의 운명을 결정해둔다. 티타가 절대로 원하지 않는 터무니없는 운명을. 한편으로는 마마 엘레나 역시 이 터무니없음의 피해자이기도 한데, 마마 엘레나는 피해를 감수하고도 규칙의 세상을 지키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농장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요리의 레시피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느라 정작 그 요리의 맛은 모른다. 그녀에게도 사랑의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지만, 마마 엘레나는 그 순간을 도려내서 상자에 보관했다. 마마 엘레나는 불행으로 값을 치렀다.티타는 마마 엘레나처럼 규칙의 세상을 유지해야 하는 과업을 타고났다. 결혼을 할 수 없는,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막내딸로 태어났으므로. 그러나 티타에겐 페드로가 나타난다. 마마 엘레나에게도 그랬듯이, 사랑의 세상이 티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누구에게나 끓어오르는 도넛의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마마 엘레나는 자기가 평생을 바쳐 만들어놓은 그 규칙의 세상이 티타의 불꽃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티타의 적이 되는 것이 마마 엘레나의 숙명이다. 티타를 절망에 빠트리고, 사랑의 세상을 완전히 덮어버리기 위해 터무니없는 짓을 한다. 로사리우와 페드로를 결혼시키고, 맛있는 요리를 칭찬하지 못하게 한다. 이건 터무니없는 짓이다. 하지만 로사리우와 페드로는 모두 첫 번째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세상 안에서는 터무니없다는 것을 깨닫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 없이 결혼하고, 결혼할 수 없는 사랑에 고통받고, 산모는 젖이 나오지 않고, 동정녀는 젖이 나오는 무언가 단단히 어긋난 세상을 살아간다.사랑의 유예 불가능성점심시간을 틈타 책을 후다닥 읽었다. 몇년 전,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칼럼계 아이돌 칭호를 얻은 김영민 교수의 산문집,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이다. 칼럼계 아이돌은 이번엔 ‘정치’를 안내하는 박학다식한 가이드로 분한 것 같다. 정치 개론에서부터 출발한 넉살 좋은 가이드의 이야기는 제도와 역사와 개념들을 드문드문 꿰어가며 우리 사회의 일상적 풍경까지 도달하는데, 글 하나하나마다 명화, 고전, 영화 등 인문학적 양념이 워낙 잘 쳐져 있어 읽는 재미도 상당하다.그런데 이 책, 재밌다고 해서 마냥 가벼운 건 아니다. 외려 묵직한 카운터 펀치를 숨기고 있다. 탈정치화되기 쉬운 세태를 인정하면서도, 그 경향성을 은근하게 조소한다. 전문성이 유명세와 혼동되고, 논쟁과 합의가 마케팅으로 대체되고, 시민이 팬으로 환복 하는 풍경을 슬쩍슬쩍 보여주며 당신의 내면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은근히 눈짓한다. '오... 이거 흥미로운데?' 하며 가이드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도착하는 곳은 언제나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이다. ‘정치’인 줄 알았던 여행지는 이제 보니 ‘인간’이었다.그런데 인간으로 사는 것은 참으로 귀찮은 일이다. 여행의 끝에서 피로가 100% 확률로 기다리고 있듯이. “귀찮음이 기본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가이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가이드의 뒤통수에다가 대고 외치고 싶다. “그냥 살면 안 될까요?” 가이드는 근엄하게 답한다. “...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지당하기만 한 도덕적 담론을 넘어서는 강철 같은 생각이 필요하다. 잘 다져진 절망과 희망을 안고 강철로 이루어진 생각의 징검다리를 밟으며 죽을 때까지 의연하게 걸어가야 한다”. ‘왜 인간이 되어야 하냐’는 질문에 ‘그래야 살아남는다’고 대답하다니. 여행이 아니라 <오징어 게임>이었던 걸까?인간으로 사는 일은 개같은 문제입니다최근의 여행은 제주도였다. 내겐 여행 갈 때 책을 딱 한 권만 들고 가는 버릇이 있다. 혹시나 시간과 비용을 쏟아서 가는 여행이 아무 의미 없이 끝나는 게 걱정돼서, 책이 담고 있는 의미가 여행의 의미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챙긴다. 의미의 보험이랄까. 책은 공들여 선정하지 않고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뽑아서 간다. 좀 미신적인 면모도 있지만 의미 부여란 결국엔 다 그런 거 아닌가.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얻은 책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신형철)』이다. 표지가 노란색 꽃이 가득 피어있는 들판 같길래 골랐다. 제주도 하면 유채꽃이니까. 저자는 책머리에 이런 문장을 써뒀다.<나는 해석자다. 해석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이토록 근거가 탄탄한 자기소개라니. 책에 실린 모든 평론들이 모두 책머리에 실린 문장의 근거가 된다. 이 견고함은 나를 매료시켰다. 자신의 직업을 설명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풍부한 사람을 부르는 말은 아마 '프로'일 것이다. 풍부한 포트폴리오에 덧붙여 <나는 OOO이다. OOO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면 그는 '프로' 이상의 무언가이지 않을까.저 문장을 읽고 확실해졌다. ‘OOO'을 찾는 것이야말로 나의 오랜 욕망이었음을. 대학 졸업 후 나는 눌러앉을 직장을 찾는 대신 'OOO'을 찾아 헤매왔다. 비행기 차창 밖으로 구름을 봤다. 만약에 지금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찾아 그 모든 헤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것이다. 공기업에서 일할 땐 성과라는 말이 왠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느껴져서, 그게 참 못 견디게 싫었다. 마케터로 일할 땐 나쁜 점도 보이는데 좋은 점만 말하는 게 피곤해서 싫었고. 지금은? 청소, 배달, 택배 '플랫폼 노동 3신기'와 가뭄에 콩 나듯이 들어오는 일거리를 받아 풀칠이야 하고 있지만 다 싫은 건 매한가지다. 이 생활에 미래가 없는 줄은 알았지만 시간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느 때보다 시간이 모자란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영원히 젊을 순 없는데, 아무래도 나는 아무것도 내려놓지 못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바보인가 봐. 여행이나 다니고 책이나 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지금 죽는구나. 여행 가는 길에. 책 읽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나는 OOO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