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상가
시리즈 「장면과 각주」의 5번째 글 / 전 5편No. 0236
2026.03.01 · 464자 · 약 1분 · 도판 16점
야, 우리 옷 사러 갈래.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웃긴데,
그땐 옷을 산다는 게 꽤나 위험한 일이었지.
가게에 가면
바짝 쫄아선
어느 학교의 누구인지를 대고
어깨에 올라온 손을
치우지도 못한 채
살살 웃어 주면서
현금으로 계산을 했다고.
학원에서처럼 말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것 하나 더.
아침에 만나는 선생
저녁에 만나는 선생
모두가 내 패딩잠바를 원했어.
선생들을 조심하렴.
시험기간이 한번 지날 때마다
지하상가엔 점점 더 빠삭해졌는데
나중에 보니
이게 인천에도 있더군.
부산에도, 서울에도.
도시엔 있는 건가?
한 번은 선생들을
쫓아다니다
일감을 받은 적도 있지.
출입증을 목에 딱 걸고
몸에 착 달라붙는 스커트를 입은
내 또래 여자애들과
나랏돈으로 산 도시락을 까먹다
진짜 높은 선생이 오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걷는 여자애들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플래시 터트리기.
뭐, 쉬운 일이었지.
그나저나 옷이 필요한데.
여긴 예전 그대로라곤 못하겠군.
속옷만 입은 마네킹
창살 쳐진 와플가게
자전거를 타고
형광등 아래를 질주하는
술 취한 노인네
아무래도
이력서엔
거짓말을 쳐야겠다.
패션을
독학했음.
각주의 각주
-지하상가 : 원래 용도는 방공호였다. 놀리기 아까워 상가로 쓰기 시작했다.